찰스 디킨스의 '황폐한 집'을 읽은 후 '나보코프 문학 강의'의 해당 파트를 읽다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.

레이디 데들록은 이 자리에서 에스터를 비롯한 세 젊은이를 소개받죠. 사랑스러운 에이다를 소개받은 뒤 레이디 데들록은 우아하게 말합니다.
" '당신의 그 돈키호테 같은 성격 중 청렴한 부분을 잃어버리겠군요.' 레이디 데들록이 어깨너머로 잔다이스 씨에게 다시 말했다. '잘못된 일을 이런 식으로 바로잡기만 한다면요.' "
...(중략)
레이디 데들록은 법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두 젊은이를 받아들여 지원해주는 잔다이스에게 돈키호테 같다면서 은근히 칭찬하고 있습니다.

- <나보코프 문학 강의> 중에서, p.234

저 부분이 내 기억과 너무 달랐다. 내가 읽은  '황폐한 집'에선,

잔다이스 아저씨는 에이다를 정식으로 소개하고, 귀부인은 어깨너머로 다시 말했어요.
"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후원만 한다면, 선생께서도 정의로운 돈키호테 같은 특징을 잃겠군요."

- <황폐한 집 1> 비꽃/김옥수 번역 중에서, p.392

존 잔다이스가 에이다를 후원'만' 하면 안 될 것 같지 않나? 그래서 당시에도 결국엔 저 둘이 연결되는 건가? 하며 읽었었는데, 암튼, 그래서, (요약본 제외하고) 비꽃 이전에 유일한 번역본이었던 동서문화사의 '황폐한 집'을 구입/확인해봤다.

아저씨가 에이더를 정식으로 소개했습니다.
"당신이 이런 미인의 고생을 덜어준다면" 부인이 다시 잔다이스 씨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. "돈키호테다운 사심 없는 면모를 잃게 되겠는데요."

- <황폐한 집> 동서문화사/정태룡 번역 중에서, p.303

여기까지 확인하고 원서를 확인해보고 싶었다. 원서로 읽는 것에 비해 번역본은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처절하게 느꼈고-
동서문화사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비꽃은 그래도 주석을 꽤 친절히 달아놔서 아, 이게 (영어의) 두운 말장난이구나, 이 인물의 이름의 뜻은 저것인 걸 보면 인물의 성격이 이렇겠구나, 읽으며 알 수 있었는데, 그럼에도 불구하고,

선거 때 레스터 경이 친척들과 함께 체스니 월드에 모이기 직전에는 음악적이고 낭랑한 'so' 발음이 울려 퍼집니다.

"유서 깊은 저택은 황량하고 엄숙하게 solemn 보인다.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설비들은 아주 so 많은데, 사람이라고는 벽에 그림으로 걸린 사람들뿐이다. 이 사람들은 그렇게 so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갔다. 데들록의 성을 지닌 누군가가 어쩌면 깊이 생각에 잠긴 채 이 그림들 앞을 지나간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. 그들은 그렇게 so 이 회랑을 조용히 숨죽이고 보았다. 지금의 나처럼. 그러니 so 생각해보라. 지금 나처럼.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이곳에 생길 공백을. 그러니 so 깨달아라. 지금 나처럼. 그들이 없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. 그러니 so 내가 그들의 세상을 떠나듯이 이제 내 세상에서 떠나라. 소리가 울리는 저 문을 닫으면서. 그렇게 so 그들을 그리워하게 될 공백을 남기지 말고, 그렇게 so 죽어라."

- <나보코프 문학 강의> 중에서, p.242

저런 리듬감 넘치는 'so' 발음들은 번역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. 😭
사실 원서를 찾아볼 실력이 됐다면 처음부터 번역으로 읽지도 않았겠지.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.

구입한 김에 동서문화사의 '황폐한 집'을 읽을까 했지만 너무 두껍고 19세기 영국에 좀 질려서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'보바리 부인'을 시작할까 했지만 기가 쭉쭉 빨렸다고 해야 되나.. 하여 아키요시 리카코의 '성모'라는 미스터리 책부터 읽기로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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